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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0 울 엄마 4

울 엄마

Posted 2010. 4. 20. 05:05

울 엄마 별명는 게슈타포였습니다.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이 별명은 우리 네 자매 사이에 통하는 울 엄마의 별명이랍니다.
내가 자랄 때까지 아침 저녁으로 두차례 들어오는 버스가 전부일 정도인 촌구석에서
딸 여섯중에 첫째로 태어난 울 엄마..

할머니가 나고 엄마가 나고 언니들이 나고 내가 태어났던 고향의 마을은
전쟁이 난 줄도 모르다가 피난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알았다고 할만큼 구석진 곳이었답니다.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몇 해가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인 그런 곳에서 조용조용 살았다지요.
그렇게 살다가 읍내와 집을 오가는 아빠 눈에 홀딱 들어가 결혼을 해서
그시절 거의가 그랬듯 엄한 시어머니를 만나서 고생바가지를 떨며 또 그렇게 살았답니다.
살얼음 같은 시집살이 조금이나마 수월하려면 아들손주라도 떡하니 안겨줘야 하는데
낳는 족족 달린거 없는 기집애들이었답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마지막이었으니 기대가 오죽했으랴 싶습니다.
울 엄마는 남산만한 배를 해가지고 고구마를 캐고 있었답니다.
산통이 오는걸 버티고 버티다가 고구마 캐던 손으로  아래를 만져보니
머리통이 뾰족한 것이 또 기집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기는듯 집으로 돌아와 나를 낳고는 또 한번 하늘이 무너지셨겠지요..
핏덩어리를 씻기지도 않고 수건에 대충 싸서 윗목에 밀어놓으셨답니다.
불기도 없는 방구석에서 서러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미역국을 끓여 먹었더랍니다.
핏덩어리가 울든 말든 미역국을 끓여 그렇게 혼자 꾸역꾸역 먹었더랍니다.
며칠 후에 큰어머니가 나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울집 딸은 셋으로 끝이었을 겁니다.
자라는 내내 비실거리는 막내딸을 보며 그탓인가 싶기도 했답니다.
할머니도 독한 사람이었지만 엄마도 참으로 지독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딸 넷 둔게 무슨 죄냐며 대들었고 결국 딸 넷을 그 독한 시어머니에게 버려두고
혼자 상경해 버렸으니까요.

내 어릴적 기억은 그렇습니다.
엄마도 없었고 아빠도 없었고  또래와 어울기에 한창이었던 큰언니와
큰언니를 따라다니던 작은언니..  뒤쳐져 놀던 셋째언니와 나...
항상 저놈의 기집애들 하며 눈을 흘기던 할머니..
엄마가 우리를 두고 서울에서 무엇을 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아들자식 하나밖에 모르던 어머니를 두고 마누라를 따라 나섰던
아빠가 무엇을 했을지 모를 일이지요.  그때는...
독하디독한 엄마가 서울에 작은이모집 방한칸이라도 얻어서 우리를 끌고 올라올때까지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았을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추위가 한창이었던 일월의 어느날 외할머니가 명주실타래 꼬아논 것같은 하얀 목도리를 하고
나를 데리고 기차에 올랐던 날... 할머니의 그 하얀 목도리에 온통 게워냈던 기억..
길에는 군데군데 녹다 남은 눈과 허옇고 누런 연탄재가 흩어져 있었고
처음 보는 이차선 도로는 어지러웠습니다.

이모집에서 얹혀살기를 몇년 했을까..
맏이가 동생집에 얹혀사는게 맘에 걸려서였을까 엄마는 어느날 우리 식구끼리 살아보겠다고
창 하나 나있지 않은 단칸방을 얻었습니다.
엄마는 집에서 삽십분 거리에 있는 금속공장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셋째이모부의 소개로 들어간 회사였는데 제법 규모가 있었죠.
보통은 일곱시쯤 끝나서 일곱시 반쯤이면 퇴근을 하거나
야근이 있는 날은 한두시간 뒤쯤에 퇴근을 했습니다.
그 시간이 거의 정확했기 때문에 일곱시 반이나 여덟시 반.. 또는 아홉시 반에 맞추어
서울에 와서도 여전히 짝궁이었던 셋째 언니와 버스정류장에서 엄마를 기다리곤 했는데
엄마가 타고 오는 버스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반가운 맘이란...

나는 늦은 나이까지 엄마 품에서 잠들곤 했나 봅니다.
양치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있는 엄마품에서 맡던 엄마의 냄새가 지금도 또렷한걸 보면..
가끔은 진하지 않은 술냄새가 나기도 하고..
그무렵 엄마는 회사에서 야유회를 다녀오고 나면 팔이며 다리에 멍이 들어있곤 했는데
그건 술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는 울 엄마가 오가는 버스에서 어떻게 놀았는지의 흔적이었습니다.
가끔은 버스정류장 앞 시장에서 아줌마들하고 한잔 하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죠.
그런날은 술꼬대도 제법 했는데 아침만 되면 기억이 안난다는 바람에
아빠랑 녹음을 해뒀다가 들려줄까 했던 우스운 기억도 생각나네요.
대게는 누군가를 부르며 우는 걸로 시작해서 끝나기 때문에 그런 날은 밤이 길었습니다.

엄마는 어디든 다니고 구경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경복궁이고 덕수궁이고 가자고만 하면 어찌나 아이처럼 좋아하는지..

그런 엄마가..
내가 큰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던 해 당신 생일에 오이도 갯벌에서 쓰러지셨습니다.
그날도 당신 생일에 맞춰 모여든 자식들이 내일은 조개나 잡으러 가자는 소리에
좋아서 아침밥도 안먹고 서두르더니만...
이른 시간이었지만 볕이 뜨거운 8월이었기 때문에 의심없이 일사병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위 셋이 번갈아가며 엎고 끌고 나와 동네 병원으로 다시 동인천 길병원으로...
다시 구월동 길병원으로 정신없이 돌았지요. 뇌출혈이었습니다.

.....

그리고는 이제 아빠가 홀로 계십니다.
평생 엄마에게 고생만 시키던 아빠.. 경제적 능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던 아빠...
그래서 자식들에게 좋은 소리 한번 못듣고 사는 아빠...

친할머니는 아들 둘 있던 집에 재취로 들어와 아빠를 낳으셨답니다.
귀하디 귀한 아들.. 군대도 보낼 수 없어 돈으로 빼내셨다 했지요.
그렇게 귀한 아빠와 딸 여섯중에 맏이로 일복을 업처럼 타고난 엄마가 만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잠이 안오는 밤입니다.